스테디셀러 에세이스트 정영욱이 마주한
가장 어두운 사랑의 민낯
“찬란한 것을 의미하는 ‘특별함’이 무채색으로 변질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처음이 되어야 했을까.
별처럼 반짝이는 삶으로 여겨지며
얼마나 많은 이들의 어둠을 견디어 내야 했을까.”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때로 구원이었고, 때로는 상실이었다. 예고 없이 밀려와 우리를 삼키고 이전의 표면을 잃게 한다.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면서도 점점 더 가라앉고 있다는 예감이 끝내 사라지지 않던 시간들. 붙잡고 싶은 마음과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맞부딪치던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희뿌연 모순을 껴안은 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버텨 왔다.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 『잔잔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참 애썼다 그것으로 되었다』 등 여러 베스트셀러를 선보인 독보적 에세이스트 정영욱 작가가 약 2년 만에 신작 『구원에게』로 돌아왔다. 이번 책에서 작가는 그간 이어 온 위로의 결에서 물러나, 사랑이 남긴 상처와 균열, 어두운 구석에 남겨 두었던 감정의 잔여들까지 덜어 내지 않고 담담히 써 내려간다.
“이토록 환희에 가득 찬 일이 또 있을까요.
오늘 잠시 마주쳤거나 고작 하루를 함께했거나
길어 봐야 일 년을 함께한 이가 나의 운명일 수도 있다니요.
그리고 나는 그 운명을 아주 태연히 지나칠 수도 있다니요.
운명이란 신이 창조해 낸 거대한 흐름이 아닌,
고작 한 인간이 만든 일말의 감정일 수도 있다니요.”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며 붙잡았던 감정은 과연 얼마나 많은 선택과 우연 위에 놓여 있었을까.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시간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마음이 남아 있었을까. 이미 끝났다고 믿었던 감정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그 관계에 어떤 의미라도 부여하고 싶어진다.
사랑은 거창한 약속이라기보다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하루에 가깝다. 그래서 더 쉽게 놓치고, 그럼에도 오래 남는다. 『구원에게』는 사랑을 특별한 이야기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우연과 인연이 지나간 자리와 남겨진 마음을 숨기지 않고 마주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지나왔지만,
쉬이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책 속으로
무관심, 무관심… 이 세 음절을 종일 껌처럼 곱씹다 아차 싶었던 것은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는 것이었다. - 〈다정〉 中
너저분해진 발톱을 깎다가 실수로 속살까지 파낸 적이 있다. 그로부터 한동안은 발끝이 신발에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 탓에 걷는 모양새가 어설펐다. 그 이후로는 붕대를 감지 않았는데도 엉성한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을 보면 이내 ‘발톱을 다쳤나…’ 하며 행동거지를 나름 추측하고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 〈염세〉 中
이 세상에는 쓰고 닳아야만 그 의미가 완성되는 것들이 있으니까. 생을 다하는 일. 모든 심지를 다 태우는 일. 어쩌면 그것만이 인간이 지닌 본래의 운명일 수도 있으니까. - 〈열망〉 中
나이를 먹으니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 대신 성이 앞에 붙은 직업이나 직책, 구성원의 역할로만 불린다. 그래서인지 비가 내 이름 끝에 씨를 붙여 발음하는 걸 좋아했다. “영욱 씨.” 그가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를 때면 내가 정의되는 느낌을 받는다. - 〈회고3〉 中
누군가를 보며 그의 말과 행동, 마음이 나와 닮아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와 내가 마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그것은 닮아 있는 것도 닮아 가는 것도 아니다. 마주 선 거울처럼 서로의 빛을 반사하며 끊임없이 닳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엮이지 않았던 본연의 삶이 희미해지는 것. 타인과 마주 볼 때의 모습이 내 실체였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 〈거울〉 中
억지로 그만두지 않을 것이며 구태여 뒤돌아서지도 않을 것이다. 흐르는 대로 함께할 것이며, 스쳐 가는 대로 지나칠 것이고, 추격당한 만큼만 잡힐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규칙, 기다리지는 말기. 그러면 욕망도 기대도 점차 누그러질 것이다. - 〈다짐〉 中
이제 네가 내 애인이야. 나는 네 사람이고. 안녕, 안녕. 이 안녕은 무엇일까. 유구히 쌓인 과거를 향한 간곡한 안녕이기를. 그리고 이제 막 도착한 이에게 건네는 반가운 안녕이기를. - 〈연대〉 中
이토록 환희에 가득 찬 일이 또 있을까요. 오늘 잠시 마주쳤거나 고작 하루를 함께했거나 길어 봐야 일 년을 함께한 이가 나의 운명일 수도 있다니요. 그리고 나는 그 운명을 아주 태연히 지나칠 수도 있다니요. 운명이란 신이 창조해 낸 거대한 흐름이 아닌, 고작 한 인간이 만든 일말의 감정일 수도 있다니요. - 〈운명2〉 中
나의 초라한 젊음 속에서 성숙한 사람이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이득에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기필코 사랑을 숨겨 버리는 것. - 〈무화〉 中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가 무화과지. 모두가 꽃이 피지 않는 무화과가 된 거지. 실은 안에서부터 나를 피워 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붉은 욕망과 관계의 실이 엉켜 내 추잡스러운 단면이 완성되는 거지. - 〈무화2〉 中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은 운명을 믿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