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눈물이 날까요?
국회 가면서 저는 정말 못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우리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들 다시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목숨걸고 간 건데,
‘계엄이 아니라 계몽이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않았느냐’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 화나는 걸 넘어서 울컥울컥해요.” _박선우(대학생)
“인터뷰가 거듭될수록 그날의 기억은 때론 겹치고, 때론 범접하기 힘들었다. 겹친다면 주저함이 없었든, 망설이다가 뒤늦게 나섰든 국회 앞으로 달려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언뜻 평범해 보이는 시민들이 토해내는 그날 밤의 기억들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충남 당진 소재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 홍원기씨는 야간 근무 직전 몸을 돌렸다. 속도위반 딱지만 수십 장을 떼가며 여의도로 질주했다. 학기말 석박사 과정을 지도하던 오현옥 교수는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이 많은 자신이 희생되는 편이 나을 거라며, 가족을 두고 혼자 지하철을 탔다. 일주일 치 고양이 밥을 주고 나오거나, 며칠 노숙할 행장을 꾸려 출발했다는 기억들이 흔했다.
너 나 할 것 없는 공통된 기억에는 죽음이라는 단어도 당연했다. ‘자근자근 밟히겠다’ ‘발가벗기고 구타부터 당하겠구나’ 이 밤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셀카를 찍어 남기거나 저마다의 SNS에 국회로 간다는 말을 남겼다. 연락이 끊기면 국회 본관 앞을 찾아보라고 가족들에게 일러두거나, 연행과 고문에 대비해 휴대폰 유심을 뺄 준비를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윤석열이 주장한 그날 밤에 대해 시민들은 생생한 기억으로 답했다. 특전사의 헬기 굉음은 찢어질 듯했고,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때리는 얼굴은 아팠다. 군용 차량을 보고 한 사람이 뛰기 시작하자 여러 명이 같이 뛰어 그 앞을 막았다. 구호를 선창하다 목이 쉬면 그 옆 사람이 외쳤다. 쇳소리에 쇳소리가 겹쳤다고 했다. 계엄군에게 ‘추리닝’을 입은 채로 얻어맞기 싫어서 코트에 구두까지 신고 온 시민이 있는 반면, 계엄군을 만나면 동네 산책으로 위장하기 위해 잠옷에 패딩을 입고 뛰어온 부부도 있었다.” _에필로그
담을 넘은 사람들, 등을 내어준 사람들,
울부짖은 사람들, 시민 앞에 고개 숙인 군경들…
그날 그곳을 온몸으로 버텨낸 우리 모두에게
2024년 12월 3일, 그날은 우리가 누려오던 소중한 것들을 하룻밤 사이에 잃을 뻔한 날이었다. 이 책에 한데 모인 123인의 증언자들은 한동안 ‘잠을 잘 이루지 못했고’, 계엄군에게 끌려가 케이블타이로 묶일 뻔하다가 겨우 풀려난 어느 기자는 ‘인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모든 증언들을 집요하고도 절실하게 채록한 주인공들이 있다. 그날 밤 국가기간방송인 KBS 앞의 기이한 고요와 적막을 기억하는 PD들이 있었다. KBS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 제작팀은 아무도 시키지 않고, 지원하지도 않는 12.3 비상계엄 증언 채록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단 한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든 유지하겠다고 발동한 계엄령이 대한민국 전체를 어떻게 무너뜨릴 뻔했는지, ‘비상계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되새기고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그날의 상흔을 낱낱이 기록하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으로부터 이 장대한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그날 군용 차량을 온몸을 던져 가로막은 시민 ‘탱크맨’이 있었고, 계엄군의 총구를 맨손으로 결연히 붙잡아선 안귀령 대변인의 분투가 있었으며, 월담하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뒷모습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간 조명되지 않은 모두의 그날이 와르르 쏟아져나와 가슴을 울린다. 시민들에게 지금 국회의사당으로 와달라고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외치던 이재명 대통령(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의 라이브 방송을 다시 들어보면 누군가 조그맣게 흐느끼고 있다. 어쩌면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남편을 보내는 김혜경 여사의 울음소리였다. 그날 국회의사당 전체에는 돌연 불이 환하게 켜졌는데, 그것은 계엄 해제 요구안 표결 전에 계엄군에게 체포되지 않기 위해 본회의장 가까운 어느 방에 숨어들었던 우원식 국회의장을 감추기 위해 국회 직원들이 선택한 묘수였다.
시각장애인 김예지 의원은 그날 밤 국회 앞으로 달려갔으나, ‘배리어프리(barrier-free)’를 외치던 자신 앞에 놓인 높고 무서운 담을 본다. 그리고 끝없이 그 담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애타는 맘으로 그 밤을 견딘다. 국회의원 고민정은 시인인 남편 조기영이 국회로 바래다주는 길, 돌연 ‘아내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내의 이름 석 자를 등뒤에서 크게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한 채 차에서 뛰어내려 국회로 달려들어간다. 연말 기분좋게 동료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다가 비상계엄 소식을 듣고, 신문사 ‘윤전기’를 지켜내기 위해, 그리고 ‘호외’를 발행하기 위해 양말과 속옷을 잔뜩 싸들고 신문사로 당장 돌아간 기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계엄을 막아낸 무수한 시민들은 혹시나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이 될까봐 가족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SNS에 국회로 간다는 흔적을 남기고, 누군가는 헬멧에 자신의 이름 스티커를 붙인 채 결연하게 국회로 향한다. 그러나 대단한 정의감이나 역사의식 때문이라 말하는 이들은 드물다. 그들은 그때는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고 담담히 말한다. 마치 대로변 트럭에서 물건이 왕창 쏟아졌을 때 사람들이 다가가 물건을 정리해주듯이, 누군가의 애사를 들으면 일상을 멈추고 발걸음이 그리로 향하듯이, 그 밤 시민들은 국회 앞으로 모이고 뭉쳤다.
그날 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만민공동회’를 방불케 하는 시민들의 자유 발언이 이어졌다. 광주에서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는 사람, 시험공부를 하다가 열받아서 나왔다는 중학생, 우리 세대의 잘못이라며 고개 숙이는 60대, 혹시라도 두드려맞든 총에 맞든 다치면 응급키트를 구비해왔으니 자신이 치료해주겠다고 말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2024년 12월 3일 그날은 예기치 못한 지옥이 성큼성큼 다가온 밤이기도 했지만, 그 지옥의 도래를 막고자 모두가 하나가 된 눈물겨운 밤이기도 했다.
“구김살 없이 계엄령 반대를 외치는 이 목소리들이 어찌나 그렇게 맑고 경쾌하고, 서슴없고, 가차없고, 머뭇거림이 없던지. 그 소리에 우리의 지난날들을 이제는 이양할 수 있겠다, 넘겨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여의도에 서 있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나는 여의도 자체가 그냥 행복했어요.”
_전태삼(노조활동가, 고 전태일 열사의 동생)
다행히도 현장에는 이미 군인, 경찰들 못지않은 수의 시민분들이 같이 계셨기 때문에, 그래서 무섭지가 않았던 것 같아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그 ‘동료 시민’들 때문에 무섭지도 않았고 춥지도 않았다고. _옥형빈(40세, 의류업체 운영, 전 국회의원 비서관)
정치인들도, 시민들도, 그날 밤 비상계엄을 막아낸 공을 타인에게 돌린다. 밥 한끼 대접하고 싶다고, 그때 나보다 더 용감했던 이가 있었고 자신은 별로 한 게 없다고, 어느 누구 덕분에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이 흘러넘친다. 그리하여 그 엄혹했던 밤을 우리는 수많은 이름 모를 타인들 덕분에 넘어설 수 있었다. 2024년 12월 3일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 그곳에 없었지만 애타는 마음으로 뉴스와 핸드폰을 바라보던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여기에 보관되어 있다. 그날 그곳을 온몸으로 버텨낸 우리 모두에게 그간 누군가의 치하도, 보상도 없이 이 증언을 우직하게 모아온 저자의 인사를 남긴다. “덕분에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기억과 증언에는 꾸밈이 없었다. 그날 밤 이야기에 몇 번을 울컥했다. 출연자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혼자가 아니라 든든했다며 곁을 지켜준 또다른 시민들을 추켜세웠다. 국회의원들 역시 예외 없이 그날 그곳을 지켜준 시민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밤 이후 윤석열은 내란을 부정하고, 지지자를 선동했다. 품격 없는 혐오와 불신을 난사했다. 서로를 겨눠야 돋보이는 정치 현실 앞에 헌정 파괴를 막아낸 상식과 연대가 엷어지는 것 같다는 우려와 냉소가 번지고 있다.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다시 2024년 12월 3일 밤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내란의 강은 아직 진하고 깊이를 알 수 없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냈던 기억을 활자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남겨둔다. _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