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싶다. 천선란 자네는 대체 어떤 사랑을 해온 것이냐고.”
- 박정민(배우)
박정민 배우·백온유 소설가 추천
데뷔 초부터 현재까지, 6년에 걸쳐 완성한 3부작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끝내 놓지 못하는 창백한 손의 의미를 곱씹으며 생각하게 되었다. 어째서 이토록 좀비는 지독하게 인간인가.”
- 백온유(소설가)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 다른 종말보다 더 끔찍한 이유가 뭔줄 알아? (…)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쏴야 해.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시체가 되어버린 처참한 몰골을 봐야만 해. 이게 가장 끔찍한 종말이야.“ _ 1부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종말은 좀비다.” 천선란은 이 문장으로 3부작의 문을 열며, 좀비를 익숙한 공포의 상징이 아니라 잊힘 속에서도 끝내 사랑을 붙드는 존재로 그려낸다. 그가 말하는 좀비의 비극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서도 폭력과 상실, 병과 장애로 인해 사랑하는 이를 잊어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천선란은 그 상처를 지닌 자들을 좀비로 불러낸다. 세상이 무너지기 전부터 폐허를 살아온 그들은 대부분의 인간이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기억을 붙든다. 어떻게든 해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게 천선란의 좀비는 잊혀가는 세계 속에서도 잊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지막 몸짓을 보여준다.
1부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는 좀비가 되어도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는 마음, ‘너를 살려야 나도 살 수 있다’는 3부작의 핵심 정서를 여는 출발점이 된다. 인류가 아직 재앙을 예감하기도 전에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향해 출항한 이주선을 배경으로, 동면에서 깨어난 옥주는 지구에서 감염 사태가 일어나 문명이 붕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러나 우주선에서도 비극은 되풀이된다. 좀비가 된 동료가 대부분의 선원을 죽였고, 오직 옥주가 사랑하는 묵호만이 죽지 않은 채 좀비가 된 몸으로 남아 있다. 옥주와 묵호는 가정폭력 속에서 자라며 일찍부터 폐허 속을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온 인물들이다. 묵호는 좀비가 된 이후에도 옥주를 물지 않고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 하며, 옥주는 그 마음을 느낀다.
“당장 죽을 것 같고, 가끔은 이미 죽은 것 같은데, 당장 무너질 것 같은 몸에도 이토록 단단한 뼈가 있구나. 무너지지 않겠구나. 나약하지 않구나.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걸 마음에서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는데 미리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해야지.”
_ 2부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 중에서
2부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는 멸망 이후의 지구, 그 잔해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대부분의 인간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거나 좀비가 되었고, 남은 이들은 좀비가 된 가족을 곁에 둔 채 버텨 나간다. ‘제비’는 의식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엄마를 돌보며, 자신과 엄마를 지켜주던 아버지 ‘비둘기’가 사라진 뒤 스스로 가장이 되어 생존해 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리 하나를 잃은 채 딸 ‘노윤’과 살아가는 ‘은미’를 만난다. 은미는 정신 발달 장애를 가진 노윤을 보살피며 폐허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제비는 그런 은미의 목숨을 구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끝내 마음속에서도 그들을 죽이지 않으려는, 잃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지막 의지를 보여준다.
“천국은 바라지도 않아. 어디든 저승의 남은 땅에 같이 있게만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가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데.“
_ 3부 「우리를 아십니까」 중에서
3부 「우리를 아십니까」는 전 인류가 떠나거나 죽어버린 뒤 오직 좀비와 동식물만 남은 지구에서,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지만 기억과 의식을 지닌 화자가 좀비가 된 아내를 리넨 카트에 싣고 바다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그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동안 아내가 좀비가 되기 직전까지 남긴 녹음을 길잡이 삼아 걸으며, 두 사람이 함께 돌보던 거북이 ‘장풍’을 고향인 바다로 돌려보내려 한다. 이 마지막 동행은 도피나 생존의 발버둥이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 발을 들인 존재가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밟는 과정에 가깝다. 화자는 녹음 속 아내의 목소리와 자신의 머릿속에 파편적으로 남은 기억을 통해 아내가 지키고자 했던 인간성을 되새기며, 살아 있음이란 맥박이나 온도가 아니라 서로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야말로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유일한 힘임을 이해하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을 너무 오랫동안 마음에서 죽였다. 살길 바라면서도 내 안에서 내가 죽여버린 사람.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 살아 있음을 너무 힘겹게 증명해야 하는 사람.”
_ 「작가의 말」 중에서
이번 연작은 천선란 문체의 새로운 결을 드러낸다. 그는 탄탄한 서사보다 감각의 파편과 정서의 여운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좀비 서사를 다시 쌓아 올린다. 기억의 단면과 현재의 폐허가 교차하며 하나의 몽타주처럼 이어지고, 인물들은 언어보다 먼저 다가오는 호흡과 떨림, 시선의 잔광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문장은 논리보다는 리듬에 가깝고, 독자는 사건을 이해하기보다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리듬은 천선란의 문장이 감정과 윤리, 서사와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까지 밀고 들어간 결과다.
이번 작품은 좀비 장르의 외형을 빌리되, 그 속에서 인간의 내면 리듬과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한다. 폐허 속의 고요, 사랑과 상실의 경계, 살아 있다는 사실이 만들어 내는 미묘한 긴장이 전편을 지배한다. 문장은 감정의 진폭을 좇으며 죽음과 생존 사이의 온도 차를 세밀하게 기록한다. 그리하여 천선란은 질문을 던지는 작가에서 감각으로 답을 내는 작가로 나아간다. 세계가 무너진 자리에서도 문장은 숨 쉬듯 이어지고, 그 호흡 속에서 인간의 존속이 다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