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룬 가장 권위 있는 기록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독일과 연합군에 의한 반도의 분할과 해방, 반파시즘 저항운동을 주도한 좌파와 연합군을 등에 업은 우파의 격렬한 대립,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에서 시작해 1950~60년대를 거쳐 선진 공업국으로 빠르게 도약한 경험으로 수놓아진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다룬다. 또한 무솔리니부터 그람시, 톨리아티, 베를링구에르, 베를루스코니에 이르는 이탈리아 주요 정치인들의 꿈과 좌절은 물론, 해방 직후 공장 점거 운동과 1969년의 ‘뜨거운 가을’, 공장평의회 운동과 자율주의 정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탈리아’를 건설하고자 분투한 이탈리아 민중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이 나라의 근대성으로의 극적인 이행을 개관하면서 유념하고자 했던 것은 적어도 리소르지멘토 이후로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항상적이었던 다음과 같은 특정 주제와 쟁점, 즉 엘리트들이 자기들 밑에 있는 계급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구축하지 못하는 무능력, 국가의 허약함과 비능률, 이탈리아 사회 안에서 가톨릭이 지닌 힘, 이탈리아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들이 지닌 계급의식, 중간계급인 체티메디의 특별한 정치적 역할, 지속적인 남부 문제 등이다. 아울러 개인주의와 연대, 가족과 집단성까지 살펴보면서, 나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몰락한 이후 45년의 이탈리아 역사에서 이런 관계들이 변화해 가는 양상을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전쟁과 빨치산 투쟁, 분단, 파시즘의 등장과 몰락, 좌우파 대립,
무솔리니부터 그람시, 톨리아티, 베를링구에르,
베를루스코니에 이르는 비극과 희극의 역사
이탈리아 현대사
반파시즘 저항운동에서 이탈리아공산당의 몰락까지
현대 이탈리아 역사를 다룬 가장 권위 있는 기록,
폴 긴스버그의 ?이탈리아 현대사?
A History of Contemporary Italy: Society and Politics 1943~1988
폴 긴스버그 교수는 이탈리아 현대 정치사와 정당정치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적극적인 좌파 정치 운동가이기도 하다. 1945년 영국에서 태어나 현재 피렌체 대학교 유럽 현대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이탈리아 사법 체계와 대학 구조를 지켜 내기 위해 ‘리볼타 데이 프로페소리’(교수들의 반역)를 조직하는 등 시민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탈리아 현대사』는 그의 대표작이자 이탈리아 현대사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평화의 문화에 기초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다수파를 형성할 힘을 획득하고
설득과 대중 참여의 힘으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넘어설 대안적인 운동을 구축할 수 있을까
…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 독일과 연합군에 의한 반도의 분할과 해방, 반파시즘 저항운동을 주도한 좌파와 연합군을 등에 업은 우파의 격렬한 대립,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농업국에서 시작해 1950~60년대를 거쳐 선진 공업국으로 빠르게 도약한 경험으로 수놓아진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다룬다. 또한 무솔리니부터 그람시, 톨리아티, 베를링구에르, 베를루스코니에 이르는 이탈리아 주요 정치인들의 꿈과 좌절은 물론, 해방 직후 공장 점거 운동과 1969년의 ‘뜨거운 가을’, 공장 평의회 운동과 자율주의 정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탈리아’를 건설하고자 분투한 이탈리아 민중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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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나라의 근대성으로의 극적인 이행을 개관하면서 유념하고자 했던 것은 적어도 리소르지멘토 이후로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항상적이었던 다음과 같은 특정 주제와 쟁점, 즉 엘리트들이 자기들 밑에 있는 계급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구축하지 못하는 무능력, 국가의 허약함과 비능률, 이탈리아 사회 안에서 가톨릭이 지닌 힘, 이탈리아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들이 지닌 계급의식, 중간계급인 체티메디의 특별한 정치적 역할, 지속적인 남부 문제 등이다. 아울러 개인주의와 연대, 가족과 집단성까지 살펴보면서, 나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몰락한 이후 45년의 이탈리아 역사에서 이런 관계들이 변화해 가는 양상을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_서문에서
1. 이탈리아 현대사: 파시즘에서 베를루스코니까지
단테, 마르실리우스, 마키아벨리 등은 근대를 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탈리아 사상가들이다. 이후로도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 안토니오 그람시를 비롯한 이들이 그 계보를 이었다. 여러 시대에 걸쳐 돌출되었던 다양한 정치사상적 모색들은, 오랫동안 도시국가들로 나뉜 채 바티칸을 비롯한 외세의 영향력에 시달려야 했고, 리소르지멘토 이래 통일을 이룬 뒤에도 파시즘이 낳은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이탈리아의 현실을 정면으로 극복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무렵 끈질기게 펼쳐진 저항운동의 기록으로 시작해, 노동자들의 결정적인 패배로 문을 연 1980년대를 서술하며 마무리되는 이 책은, 여전히 국내에는 ‘로마’나 ‘르네상스’에 치우쳐 소개되어 있던 이탈리아사의 지평을 ‘현대’까지 확장한다. 피렌체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유럽 현대사를 가르쳐 온 저자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험을 적절하게 끌어들임으로써 비교사의 분석 틀을 가미해 이해를 돕는다. 전쟁과 빨치산 투쟁, 해방 정국에 분출된 사회적 열망과 좌절, 급격한 산업화와 이농, 노동계급 운동 등의 역사적 경험은 기시감이 들 만큼 한국 현대사와 유사한 면이 있는데, 이 또한 비교 관점의 독서로 이끈다.
2. 이탈리아 정당의 분투기이자 정치사
흥미롭게도 이 책은 해방 이후 이탈리아에서 치러진 모든 총선과 일부 지방선거의 주된 이슈 및 그 맥락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현대의 군주’에 빗대며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람시는 “정당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한 나라의 역사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탈리아 현대 정치사와 정당정치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폴 긴스버그 또한 이 책에서 정당을 분석의 한 축으로 삼고 있다. 195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현대 이탈리아 정치에서 한결같이 나타나고 있는 문제는 ‘안정적 다수파의 결여’이다. 보수를 대표하는 기민당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처음에는 중도에서, 나중에는 각각 우파와 좌파에서 정치적 동맹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불안정한 연정이 형성되었다가 해산되고, 정부들이 들어서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각 정당들이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지고자 치열한 각축을 벌이며 이탈리아 사회의 지역 및 부문에 파고드는 모습(5장 “국가와 사회의 기독교 민주주의”, 6장 “1950년대 좌파 정치와 노동계급 운동”)은 그 자체로 이탈리아 정당의 분투기이자 정치사이기도 하다. 최근 국내에서 복지국가 및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에 따라 독일과 스웨덴, 일본 등의 좌파 정당을 소개하는 단행본들이 출간되었지만 이탈리아 좌파 정치사를 온전히 다룬 책을 발견하기 어려웠는데 이 책을 통해 그 공백을 얼마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3. 국면사(콩종크튀르): 인간과 역사의 관계를 둘러싼 묵직한 질문을 던지다
이 책에는 무솔리니부터 그람시, 톨리아티, 데가스페리, 베를링구에르,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인들은 물론 CGIL과 CISL을 비롯한 노동 조직 및 여러 사회단체의 주요 인물들, 그 밖에 공장과 농장, 거리에서 만난 민중들이 빚어낸 숱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별 사건들이 소개되지만 이에 머무르지 않고 특정 시기를 아우르며 그 국면의 전후 맥락과 의미를 탐색하는데, 이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제시한 역사방법론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은 일종의 미시적 역사라 할 사건사와 거의 변화하지 않는 구조사 사이를 잇는 조건이자 상황의 역사로서 ‘콩종크튀르’(conjoncture), 즉 국면사를 통해 입체적인 이해를 제공한다. 본문의 각 장들은 현대 이탈리아의 결정적인 국면들로 구분되는데, 이처럼 (쉽게 바꿀 수는 없지만) 경로의 변화 가능성이 존재했던 시공간 속에서 여러 행위자들이 뒤얽히며 만들어 낸 동학은 그 자체로 인간과 역사의 관계를 둘러싼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책속으로 추가]
기민당은 평범한 시민이 동일시할 수 있는 국가 이미지를 창출해 내지 못했다. 시민이 국가에 결속되었던 것은 국가의 정직함, 국가가 이행하는 봉사, 국가가 보장하는 자유, 국가가 제공해야만 했던 민주주의와 정의 때문이 아니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공화국 헌법의 신화들이었다. 국가를 보는 시선은 가장 후했을 때도 냉소적이었으며, 가장 박했을 때는 국가를 정직하지 못하고 억압적이라고 보았다. 게다가 너무나 큰 소수파가, 형성 중인 노동계급이 대부분이었던 그 소수파가, 지배하는 정치 엘리트의 이데올로기에 뿌리 깊은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 이 소수파는 무관심하지도 순종적이지도 않았고, 도리어 나름의 대항-이데올로기로 잘 조직되었다. 반공주의가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 유효한 구호일 수 있었겠지만, 헤게모니의 기반은 아니었다(270쪽).
서유럽으로 이주한 이탈리아인들은 예외 없이 큰 고통을 겪었다. 1년 중 열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일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으며, 가정과 사랑하는 이들을 멀리 두고 떠나 외로이 살았다. 기혼 남성들은 부담을 짊어졌고 그 아내들은 더 큰 부담을 졌으며, 두고 온 자녀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거의 지켜보지 못했다. 1964년과 1965년에, (서부 시칠리아) 벨리체에 있는 촌락 산타 닌파의 돈 안토니오 리볼디는 스위스로 일하러 갔던 자기 교구 사람들을 방문했다. 그들은 5백 명이 넘었다. 스위스의 어떤 도시에 있는 공원 입구에서 그는 ‘개와 이탈리아인 출입 금지’라는 경고를 보았다. “이주자들을 만나 보니 고향과 가족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향수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들이 비통해할 때 여러 번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눈물을 꾹 참아서 눈가에 맺히기만 하더군요.” 서유럽의 이탈리아인들이 겪은 신산함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그들에게 ‘경제 기적’이란 해방이었던 만큼 비극이기도 했다(330~331쪽).
1964년 8월 21일 톨리아티가 소련의 얄타에서 죽었다. 흐루쇼프를 만나러 간 참이었다. 로마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1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운집했다. 톨리아티는 소규모 투사들이 모인 집단이었던 당을 비상한 방식으로 이끌고 서구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 조직으로 변형시켰다. 이렇게 대중정당을 일군 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전후 시기의 정황은 그에게 유리했지만, 이탈리아사회당의 운명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탈리아공산당이 필연적으로 성공할 것으로 예상할 수는 없었음을 알게 된다. 1944~47년에 톨리아티는 당내에서 모험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아마도 파국으로 귀결되었을) 봉기의 유혹에서 당을 끌어내 훨씬 고생스러운 그람시적 전략을 향해 당을 이끌었다. 이에 따르면 시민사회에 깊은 참호를 파고 장기적인 ‘진지전’을 펴는 것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419~420쪽).
이탈리아 학생들은 홀로 세계를 바꾸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유토피아적이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독일 학생운동이 노동계급을 구제 불능으로 통합되었다고 일축한 것과는 달리, 주변부 집단을 진정한 혁명가들이라고 역설했던 마르쿠제와는 달리, 이탈리아 학생들은 자신들이 유일한 혁명 계급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순간도 없었다. 그들은 급진적 변화를 향한 자신들의 열망이 결실을 맺으려면, 이 열망을 노동계급에게 전달하고 자신들이 내세운 대의의 필연성과 실행 가능성을 노동계급에게 납득시킬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을 거의 즉각적으로 분명히 했기에, 그들이 신망을 얻을 만했던 것이다. 따라서 68 학생운동은 대학에서, 그리고 그 대학의 가능한 개혁들에서 빠르게 빠져나와 공장을 향했다. 바로 그 공장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벌여야만 하리라는 것이 학생운동의 주장이었다(445~446쪽).
노조 지도자들이 피아트와의 합의에 서명했다. 그것은 항복이었지만, 노조에게 그 외에 다른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조반니 아?리가 유명한 승리를 거뒀고, 다가올 10년간의 노사 관계 유형이 정해졌다. 1980년 10월 15일에, 토리노의 스메랄도 극장에서, 피아트의 확대 공장 평의회를 구성했던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노조 지도자들과 만났다. 쓰라린 순간이었다. 이어지는 인용은 미라피오리 공장의 차체 공정 부문에서 파견된 대의원인 조반니 팔코네가 했던 기념비적인 연설이자, 아주 특별한 한 세대의 노동자들이 품었던 희망에 부치는 묘비명이다. “…… 나는 다른 많은 이들처럼 남부의 촌에서 올라온 이주자였습니다. 나는 누가 한턱내도 변변한 인사말조차 건네지 못할 만큼 …… 그렇게 수줍음을 탔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많이 고쳤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그런 내가 정치 연설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 언제나 여기서 일을 벌였던 건 소수의 노동자들이었어요. 언제나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행동했던 건 소수입니다. 만약 다수가 능동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면, 그들 모두가 산 카를로 광장으로 왔다면, 그들 모두가 함께 피케팅에 나섰다면, 동지 여러분, 우리는 단지 해고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더 큰 일들을 해냈을 겁니다. …… 나는 멋지게 퇴장할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사장들이 나를 다시 고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내가 그 일부를 이루어 왔던 저 모든 투쟁이 자랑스럽습니다”(584~586쪽).